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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
인문학산책 | 빅토리아 항구의 가을바람이 홍콩의 밤을 설레게 하고 있었다. 마침 부다페스트
집시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사라사테의 '치고이너바이젠'을 경쾌하게 연주하고 있었다. 사실 공연은 실내에서 이뤄지고 있었으나, 야외공연장은 영상으로
현장을 비추며 그곳이 바로 무대인 것 같은 환상을 연출했다. 고흐가 물감을 풀어놓았나 싶은 바다 위로 집시가 춤추는 느낌이었다. 나폴리보다 더
육감적인 항구도시다.
한때 역(驛)의 표지였던 시계탑 아래 야자수는 아열대의 풍경을 펼쳐놓았고, 광둥어의 독특한 성조와 발음이
중국의 다른 얼굴을 보여주고 있었다. 돌아보면 이곳에는 아픈 상처가 숨 쉬고 있다. 1840년 영국은 아편전쟁을 일으켜 청조를 난도질하고 이곳을
집어삼킨다. 홍콩은 이후 국제금융도시로 빠르게 성장하게 되지만 그전까지 동아시아 세계 자체를 의미했던 중화 체제가 이로써 깨져나가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마카오는 16세기 포르투갈 제국주의 팽창 과정의 유산이다. 바스코 다 가마가 1497년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 인도양에 다다른 다음, 포르투갈은 1511년 말레이시아의 말라카를 식민지로 만든 뒤 곧이어 중국에까지 뻗어나가 마카오를 자신의
기항지로 삼는 데 성공하게 됐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중국이 다름아닌 바로 이 두 도시 중간 지대라 할 수 있는 선전을 1979년
경제특구로 선정한 역사적 발상의 근원을 짐작하게 된다. 초라한 어촌에 불과했던 이곳을 서구의 포위망을 돌파해 세계적 자부심으로 키우겠다는
것이고, 그 장구한 계획대로 선전은 오늘날 베이징 등과 함께 중국 4대 도시의 하나가 됐다.
선전에 담은 이 같은 중국의 거대한
야망을 고스란히 읽게 하는 것이 바로 소수민족 무용을 총망라한 공연이다. 공연 제목 '용봉무중화(龍鳳舞中華)'는 얼핏 소수민족들의 민속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이들을 중화의 가치로 통합해 전 세계에서 사멸하지 않는 총천연색의 불사조로 등장하겠다는 중국의 미래를 겨냥하는
지침이다.
중국 대륙은 역사를 망각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 뼈아픈 기억 속에서 '내일'이라는 시간을, 소의 걸음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남중국해를 흐르는 집시 바이올린의 선율 속에서 아픔이 깊었던 국가가 거대한 화살이 되어 날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는 모든 것을 너무
빠르게 잊고 산다. 그래서 고통이 역사의 산모가 되지 못하고 있다./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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