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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권기봉의 도시산책]127년만에 사라지는 백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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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년만에 사라지는 백열구

경복궁 뒤쪽 깊숙한 곳에 '향원지'라는연못이 하나 있다. 한 가운데에는 '향원정'이라는 멋드러진 육각 정자도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그곳이 왕가의 휴식처이기만 했던 건 아니다. 지난 1887년 이땅 최초의발전기를 설치했던 곳이자, 그 전기로 백열구를 밝혀 역시 이땅 최초의 전깃불을 켠 곳이기도 하다. 에디슨이 백열구를 발명한 지 8년만의 일로 중국이나 일본보다도 도입 시기가 빨랐다.

다만 당시의 발전 기술이라는 것은 아직 초보적인 수준이었다. 발전기가 돌아갈 때 나는 열을 향원지 물로 식혀줘야만 했고, 기계 돌아가는 소리는 어찌나 큰지 마치 천둥이 치는 듯했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 전깃불은 재미난 별명을 얻기도 했다. '찔 증'자에 '물고기 어'자를 쓰는 '증어(蒸魚)'가 그것이다. 향원지 물을 발전기 냉각수로 쓰다 보니 자연히 수온이 올라갔고 결국 향원지에 살던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한 데서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또 발전기가 종종 꺼지고 유지비도 많이 들어가는 통에 '건달불'이라고도 불렸고, 향원지 물로 불을 켠다고 해서 '물불', 너무 묘하고 괴이한 불이라고 해서 '묘화(妙火)'나 '괴화(怪火)'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그렇게 다양한 명칭이 존재했다는 건 당시 사람들이 전깃불을 그만큼 신기하게 생각했다는 방증일 텐데, 오늘로부터 만으로 꼭 114년 전인 지난 1900년 4월 10일부터는 서울 종로에서도 첫 민간용 백열구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마치 플로피디스크나 CD가 사라져가듯 백열구를 보기 힘들어질 것 같다. 올초부터 국내에서는 백열구를 생산하지도 또 수입하지도 못하게 됐기 때문이다. 한때는 신기술의 대명사와도 같았지만 백열구야말로 전기에너지 가운데 고작 5퍼센트만 빛을 내는 데 쓸 뿐 95퍼센트는 열로 낭비해버리는 대표적인 저효율 조명기기인 탓이다.

정부에서는 그 대신 에너지 효율이 좋은 LED전구 등을 보급해 나갈 계획이라고 한다. 한반도에 백열구가 들어온지 127년만에 일어나는 변화…. 시대의 흐름을 막을 수야 없지만 그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을 지도 모를 극빈층과 같은 사회적 약자를 위한 배려는 적극적으로 주문하고 싶다.

/'다시, 서울을 걷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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