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제작자는 대부분 롤러코스터같은
인생을 산다. 부침 심한 한국 영화계에선 더욱 그렇다. 전국관객 500만 고지를 돌파하며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숨바꼭질'의 김미희(49)
스튜디오 드림캡쳐 대표도 예외는 아니다. '주유소 습격사건' '신라의 달밤' '선물' '혈의 누' 등 한때 손 대는 작품들마다 돈을 쓸어담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난해 초 선보인 '페이스 메이커'의 처참한 흥행 실패로 빚더미에 올라 매달 수 백만원의 이자와 씨름하는 생활을 1년 넘게
견뎌내야만 했다. 지난주 서울 신문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남한테 폐 안 끼치고 빚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행복하다"며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시나리오 보고 필 꽂혀
몇몇 단편영화로 재능을 인정받았지만 미완의 대기에 불과했던
허정 감독으로부터 확실한 가능성을 찾아낸 건 '숨바꼭질'의 초고 시나리오를 보고 나서였다. 귀신 없이도 일상을 배경으로 공포와 서스펜스를
이끌어내는 능력이 출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때만 하더라도 '페이스…'로 까 먹은 돈을 다시 벌어들일 것이란 헛된(?) 희망은
품지 않았다. 지금껏 해왔던대로 좋은 감독을 발굴해 손해나 보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컸다.
문제는 역시나 캐스팅이었다. 원래는
주인공 성수의 연령대가 30대 초반이었지만, 데뷔하는 감독의 부담을 덜기 위해선 40대 베테랑 배우가 있어야 한다는 판단 아래 시나리오를
수정했다.
▶ 손현주 날카로운 구석 많아
그래서 찾아낸 연기자가 바로 손현주였으나, 캐스팅 확정까지 수 차례
고비를 겪어야만 했다.
우선 영화에서 단 한 번도 주연을 맡은 적이 없었던 탓에 관객 동원 능력을 검증할 수 없었다. 또 손현주와
만나는 과정 자체도 힘들었다. 사람 좋기로 유명하지만 출연작을 고르는 눈 만큼은 깐깐하고 예민하기로 소문난 성격인데다, 드라마 '추격자'의
성공으로 여기저기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얼굴 한 번 보기 힘든 상황이 됐다.
손현주의 중앙대 연극영화과 후배인 '페이스
메이커'의 김달중 감독이 어렵게 술자리를 만들었고, 시나리오를 좋게 본 손현주로부터 마침내 승낙을 얻어냈다. "직접 겪은 손현주 씨는 TV에서
보던 것처럼 마냥 편하고 수더분한 배우가 아니더군요. 날카로운 구석이 의외로 많아 은근히 긴장했죠. (웃음). 그럼에도 정말 따뜻하고 성실한
인품의 소유자란 것은 확실해요. 현장 경험 없는 신인 감독을 대신해 몸소 막내 스태프까지 챙기는 와중에도 항상 촬영 시작 1시간전 모든 준비를
마치고 가장 먼저 대기하고 있었으니까요. 허 감독을 비롯해 투자·배급사인 뉴(NEW) 관계자 등 여러 사람들의 공이 크지만, 만약 현주 씨가
없었다면 '숨바꼭질'은 절대로 성공하지 못했을 겁니다."
▶ 제작자의 역할과
의무
현장에선 허 감독의 엄마를 자처했다. 고민에 빠지면 식음을 전폐하기 일쑤인 허 감독의 끼니를 일일이 챙기고 틈 날때마다 휴식을
권했다.
결국은 체력전인 영화 촬영에서 선장이나 다름없는 감독의 건강이 망가지면 작품이 '산으로 갈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김 대표는 "술 한잔 먹지 못하는 체질에 극도로 내성적인 성격의 허 감독이 행여라도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거나 오버 페이스할까봐 고3 수험생 엄마처럼 사사건건 간섭했다"며 "감독을 다그칠 때는 다그치더라도 풀어줄 때는 풀어주는 것이 바로
제작자의 할 일이자 선배의 의무"라고 귀띔했다.
▶ 한 때는 '미다스의 손' 불려
20년전 한국영화의 명가
시네마서비스에서 강우석 감독으로부터 영화 만들기의 전 공정을 처음 배웠다.
이후 좋은 영화란 이름의 제작사를 차려 독립했고
싸이더스FNH의 공동 대표를 역임하면서 한때 '미다스의 손'이란 호칭까지 누렸지만, 지금 그의 곁에는 사람들만 있다.
누가 "그
돈 벌어 다 어디에 감춰뒀느냐"고 물어보면 "어디 있을까요"라며 그저 웃을 뿐이다. 부와 명예보다는 영화와 사람을 쫓아 앞뒤 재지 않고 달려온
인생에 후회는 없어서다. "솔직히 '페이스…'가 망하고 나선 잠깐이나마 사람들과 영화가 싫어진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니 내게
영화와 사람을 빼면 뭐가 있을까 싶더군요. 좋은 사람과 함께 좋은 영화를 만들겠다는 초심만 오래도록 간직할 수 있다면 영화 제작자란 직업이 아주
나쁘지는 않답니다."/조성준기자 when@metroseoul.co.kr·사진/박동희(라운드
테이블)·디자인/김아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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