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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회

[김민웅의 인문학산책] 황성옛터의 낙조(落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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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데없이 험산준령이 땅 위로 솟구친다. 끝 간 데를 모르고 평원을 질주하며 우람하게 펼쳐지더니, 그 머리 상부는 하늘과 아슬아슬하게 맞닿는다. 그래서 득달같이 부르기를, "천산(天山)"이란다. 남쪽으로 내달으면 곤륜산맥이 병풍을 친 채 움쩍도 않고, 그 사이에는 타림분지가 타클라마칸 사막을 두 팔로 움켜쥐듯 껴안고 들어 앉아 있다. 수평선 없는 사해(沙海)다.

누군가 천산을 끼고 동쪽으로 걷는다면 그의 발걸음은 바로 이 지역의 분기점인 돈황을 통과해, 진시황의 호령이 무덤과 함께 매장된 서안으로 이어질 것이다. 몸을 왼쪽으로 틀어 돈황에서 하미를 향해 북으로 기울게 방향을 바꾸어 더 나가면, 우루무치가 자리를 틀고 있기 전 투루판이 이곳이 원산지인 포도넝쿨 아래 먼저 객을 맞이한다.

이 길들을 오가는 것은 손오공 못지않게 온갖 요괴들을 퇴치해야 하는 고된 여정이다. 사막과 절벽, 바위산과 초원, 나무둥치를 순식간에 뽑아버릴 바람과 만년설의 고개를 모두 버티고 넘어서야 하는 억척의 시간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무수한 이들이 드나들며 실크로드를 열었다.

투루판은 8세기 경 혜초스님이 머물렀던 고창국의 옛 성터가 있는 곳과 그리 멀지 않다. 기원전 2세기 한나라 때 이곳에 군대를 주둔시켰던 것을 시발로 이제는 황성의 옛터만 남은 고창국이라는 나라까지 당(唐)대에 있었으니, 짧게 잡아도 2천년의 역사가 그곳에 안타깝게 숨 쉬고 있다. 천산의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도대체 만만한 곳이 없구나.

아니나 다를까. 협곡을 지나는 적병을 매복했다가 공격하는 군사들의 함성과, 서로 뒤엉킨 채 활을 쏘고 칼을 휘두르는 격전의 장면이 얼핏 신기루처럼 스친다. 멀리서는 급히 말을 몰아오는 대군이 황사를 폭풍처럼 일으키며 성벽에 이른다. 누구의 원병인지, 아니면 또 다른 적인지가 당도했다. 첩보에 빠른 페르시아 상인은 이미 자취를 감추었고, 살생을 막지 못해 가슴을 치는 스님의 독경 소리가 전마(戰馬)의 울음소리에 묻힌 채 허공에 맴돌다 사라진다.

황토로 쌓은 성채는 이내 유린되고 만다. 이글거리던 해는 날개를 잃은 새처럼 떨어지고, 낙조가 붉게 물든 폐허는 홀로 그지없이 고독하다. 그러는 순간, 마음에 스며드는 소리 하나 있더라. 견고한 성보다 더 견고한 인간이 되는 길을 택하라고. 눈을 드니, 다시 들판이 산맥을 향해 휘몰아치게 내달리고 있었다./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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