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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김민웅의 인문학 산책]거리의 빛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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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풀렸다고는 하지만, 도시를 관통하는 바람에는 겨울의 체온이 역력했다. 이만하면 행동반경이 움츠러들어 한산해질 법도 한데, 여전히 발 디딜 틈 없는 거리다. 밤 열한시가 넘은 시각이다. 그러나 마치 "이제 비로소 시작하려는 판인데?" 라는 투다. 사실은 낮부터 쉬지 않고 계속 뛰는 이곳의 맥박이다. 지칠 사이가 없다.

평소의 속도대로 길을 걷는다는 것은 자칫 난폭한 몸짓이 되기 십상이다. 인파가 엇갈리며 만들어내는 빈 공간을 눈치껏 찾아, 빠르게 유영하듯 몸을 움직이는 작은 물고기가 되어본다. 뉴욕 맨해튼 42가에서 50가에 이르는 브로드웨이는, 그 순간 출렁이는 거대한 어항이 된다. 사방에는 초대형 영상들이 기다란휘장처럼 즐비하게 에워싸고, 현란하게 변환하는 시네마스코프를 펼쳐낸다.

이 거리는 대체 어떤 곳인가? '극장'이라고 하면 우리는 영화를 보는 상영관을 떠올리지만, 여기서는 뮤지컬과 연극이 무대에 오르는 장소다. 브로드웨이의 역사는 그렇게 해서 자신의 전기(傳記)를 줄기차게 써왔다. 엘튼 존의 노래로도 유명한 뮤지컬 '라이언 킹'은 1997년 이래 현재까지 최장기 공연을 하고 있고, 1987년 영국의 웨스트엔드 공연과 함께 시작했던 '레미제라블'은 막을 내렸다가 다시 금년 3월 새로운 모습으로 관객을 맞이하게 된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오페라의 유령' '시카고' 등만이 아니라 더는 볼 수 없어 아쉬움을 주는 '매리 포핀스' '고스트'나 새로이 무대에 선을 보이는 '알라딘'도 모두 브로드웨이의 자산이다. 흑인 여가수 캐롤 킹 이야기를 극화한 연극 '태양 아래 건포도'에 영화배우 덴젤 워싱턴이 등장해서 화제가 되고 있으며, 섹스피어의 희곡도 '리차드 3세'를 비롯해서 몇 개나 공연 중이다.

고대와 중세는 없지만, 현대문화의 중심을 만들어온 이 나라는 이렇게 TV화면이나 디지털의 공간이 아니라, 배우와 관객이 서로 마주보고 호흡하는 아날로그의 무대를 통해 대중예술의 거리를 가꾸어 오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 삶의 애환과 환희를 나눌 자리를 펼쳐낸다. 브로드웨이의 인파가 모두 극장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물론 아니지만, 이곳에 맑은 공기처럼 넘쳐나는 활력은 이와 무관할 수 없다.

서울의 어떤 거리를 거닐면, 우리는 공연예술에 흠뻑 취하고 자기도 모르게 들뜨고 사람의 물결 속에서 기운이 상쾌해질 수 있는 걸까? 그곳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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