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에선 매일 웃음 소리가
그치지 않지만, 정선희(41)는 남모르게 주먹을 꽉 쥐며 5년을 버텨왔다. 최고점에서 최저점으로 옮겨진 인생에서 한계와 맞닥뜨렸을 무렵 한
여인의 삶과 만났다. 일어 번역 데뷔작인 가와카미 미에코의 에세이 '인생이 알려준 것들' 속 평범한 일상은 삶의 밑바닥을 무심히 즐기는 법을
알려줬다.
▶ 난 작가와 닮은 꼴 가와카미의 작품을 만난 걸 운명이라고 말한다. 일주일을 빼곡히 채웠던 방송 일정들은 사라지고
SBS 파워FM '정선희의 오늘 같은 밤' DJ로만 하루하루를 보냈다. 남는 시간을 주체할 수 없으면서 한편으로는 좀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어떻게든 견뎌야 한다는 강박을 안고 살아왔다.
"어느 순간 더 괜찮은 날이 오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은 불안이 밀려왔죠. 버틸
힘이 사라지고 막연한 미래만이 제 앞에 놓여있더라고요. 그러던 지난 여름 우연히 번역 제의를 받았죠."
이 책은 요즘 가장 흔한
키워드가 된 힐링이나 멘토의 가르침조차 담고 있지 않았다. 작가가 늘어놓는 일상의 소소한 기억을 엿보며 '난 왜 그토록 내 삶을 대수롭게
생각해왔나' 뒤돌아보게 됐다.
"전 굵직한 일들만 중요시하고 당연한 일상은 무시하며 살아왔더라고요. 평범한 일상들을 흘려보내지 않고
촘촘하게 살아가다 보면 남과 비교할 일도, 나 혼자 비참해할 일도 한 숨 죽일 수 있겠더라고요.
가와카미는 남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 술집에서 일하는 등 풍파를 겪으며 평범하지는 않은 인생을 살아왔다. 출판사에 따르면 작가이면서 연예계 활동을 겸했던 점 등 인생관과
유머감각을 비롯한 여러 면에서 가와카미와 정선희는 닮았다.
"그의 일상을 들여다 보면서 난 너무 전쟁 치르듯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창피하면 창피한 대로, 기운차면 기운찬 대로 그렇게 때를 기다리면 되는데 말이죠. '이 바닥(방송계)에서 난 이제 쓸모 없다'는
자괴감에 몸부림치기도 했지만 또 다른 일상으로 덮으면 되는 일이었어요. 과거의 고통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만, 새로운 일로 잊고 살아가는
방법을 알게 됐죠."
▶ 문장 하나 가지고
온종일 씨름
이미 두 권의 학습서를 펴내는 등 수준급 일본어 실력을 갖췄지만 선뜻 수락한 에세이 번역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철학을
전공했고 일본 문단 최고 권위의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이력답게 은유적 표현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심지어 쉼표 하나에 담긴 작가의 수 많은 속
뜻을 우리말로 옮기기 위해 4개월간 하루 4시간씩 자며 원고와 씨름했다.
"대필의혹을 피하기 위해 원본에 형광팬을 칠해가며 일일이
각주를 달았어요. 문장 하나를 들고 하루 종일 고민한 날도 있고요. 일면식도 없는 가와카미에게 얼마나 속으로 육두문자를 날렸는지…. 단순히 이
사람의 작품을 쉽게 풀어쓰는 게 아니라 작가의 문학 세계와 일본 문화까지 이해하고 거기에 내 스타일을 입혀야 했죠."
고단한 작업의
보람은 금세 찾아왔다. 전문 번역가 수준에 버금가는 결과물이라는 출판계의 호평과 함께 글에서도 느껴지는 통통 튀는 '말빨'은 그가 진행하는
라디오를 듣는 느낌이라는 독자평이 이어지고 있다.
"나이 들어 꾸준히 할 수 있는 일이 생긴 것 같아요. 지금은 깜냥이 안 되지만
좀 더 공부해 계속 도전해 보고 싶어요. 가와카미의 말 중에 이런 게 떠올라요. '넘길 수 있는 건 시련이 아니다. 시련은 모름지기 넘기지 못할
정도로 혹독해야 제맛이다'.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마음가짐이 중요하겠죠.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제 인생의 새로운 한 챕터가 펼쳐지는
느낌이에요."/유순호기자
suno@metroseoul.co.kr·사진/서보형(라운드테이블)·디자인/원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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