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3일 발표한 '회사채 시장 안정화 방안'은 해운 조선 등의 구조조정 여파로 중·저 신용등급 기업이 자금조달에 어려움이 예상되는 만큼 팔리지 않은 회사채를 국책은행인 KDB산업은행이 직접 사주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또 연기금과 자산운용사, 보험사 등 기관이 회사채 펀드에 적극적으로 투자할 수 있도록 해 회사채 시장을 정상화하겠다는 구상이다.
시장 참여자들은 "급한 불을 끄는 데는 도움이 되겠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기엔 조금 부족하다"고 평가했다. 기업들의 체질 개선이 우선이라는 지적이다.
구원 투수로 나선 산업은행에 대한 시선도 우려다. 공적자금이 투입된 대우조선해양의 채권은행이자 대주주로서 관리감독을 제대로 하지 못해 부실을 키웠다는 지적도 받고 있다.
◆취약기업 회사채 산업은행이 5천억까지 산다
금융위원회는 3일 이 같은 내용을 담은 '회사채시장 인프라 개선 및 기업 자금조달 지원방안'을 발표했다.
이날 발표된 회사채 시장 안정화 대책의 초점은 신용등급이 BBB∼A인 비우량 회사채 발행 활성화에 맞춰졌다.
공모 회사채 발행잔액은 2008년 69조원에서 작년 말 151조원을 돌파하면서 7년간 2배 이상 증가했지만 저위험 채권에 편중돼 다양한 기업들의 자금조달 수단으로 활용되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다.
정부는 앞으로 2년간 BBB~A 등급 회사채에 한해 최대 5000억원까지 산업은행이 시장에서 팔리지 않는 미매각분을 인수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로 했다. 산업은행이 설립한 특수목적회사(SPC)가 팔리지 않은 BBB~A 등급 회사채를 인수했다가 만기까지 보유하거나 다시 신용보강을 거쳐 유동화 증권으로 바꾸어 시장에 내놓는 방식이다. 이르면 올해 하반기부터 시행되며 2017년까지 2년간 운영될 예정이다.
1조4000억원 규모의 신 P-CBO(유동화 보증) 프로그램 도입도 같은 맥락이다. 현재의 P-CBO 발행 지원 물량까지 고려하면 2018년까지 최대 4조원어치의 회사채 발행을 지원하게 되는 것이라고 금융위는 설명했다.
비우량 회사채 수요 기반 확충 차원에서 연기금과 자산운용사, 보험사 등 기관이 회사채 펀드에 적극적으로 투자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도 추진된다.
당국은 또 법을 개정해 매출 채권을 담보로 한 회사채를 발행할 수 있도록 허용할 방침이다. 렌털 회사가 일정한 기간 단위의 계약을 통해 정수기, 공기청정기, 복사기 등을 고객에게 빌려주고 매달 청구하는 요금이 대표적인 매출 채권 중의 하나다.
그간 유명무실했던 지적재산권을 담보로 한 회사채 발행 활성화도 추진된다. 이를 위해 산업은행과 기업은행은 앞으로 1000억원 범위 내에서 지적재산권 회사채를 직접 사준다.
이 밖에 300억원 규모의 펀드를 조성하는 것을 포함하면 최대 1300억원이 지적재산권을 담보로 한 회사채 지원에 쓰이게 된다.
또 각종 담보를 바탕으로 한 회사채 발행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제도적 장치로서 '회수관리회사'가 도입된다.
사모펀드가 기업에 직접 돈을 빌려 줄 수 있게 하는 '대출형 사모펀드(PDF)'도 도입한다.
그동안은 PDF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없어 사실상 금지돼 왔으나 펀드재산을 대출로 운용하는 전문투자형 사모펀드 활성화를 위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할 방침이다.
◆"급한 불 진화" vs "미봉책"
정부가 회사채 시장 활성화 방안을 들고 나온 것은 '때'를 놓치면 신용경색으로 신음하는 시장이 더 큰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회사채 시장은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기업의 자금조달 수단으로서의 역할이 확대됐지만 올해 들어 발행이 줄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해 1∼5월 일반 회사채 발행액은 15조9909억원으로 작년 같은 기간(18조2590억원)보다 12.4% 줄었다.
회사채 시장의 양극화 현상도 심화하고 있다.
금융위기 이후 지속된 BBB등급 이하 채권에 대한 투자 기피 현상이 동양, 웅진, STX, 대우조선해양 등 신용이슈 때문에 A등급까지 확대됐다
5월 한 달간 만 놓고보면 무보증 일반 회사채 발행 총액은 3조4700억원으로 전월의 4조6800억원보다 25.8% 감소했다. 등급별로는 가장 높은 AAA 등급 회사채 발행액은 1조1300억원으로 162.7% 급증했다. 그러나 이보다 한 등급 낮긴 하지만 우량채로 분류되는 AA급 발행액은 1조7천100억원으로 46.0% 줄었다. 비우량채인 A 등급 회사채와 BBB 등급 회사채 발행액은 각각 3천200억원, 2천850억원으로 56.4%, 12.3% 감소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의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가 전세계의 경제·금융 불안에 기름을 부어 양극화 문제는 회사채 시장 전반의 문제이자 금융시장 불안으로 전이될 수 있기 때문에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답이 나온 것이다.
시장의 평가는 기대반 우려반이다.
채권시장 참여자들은 이번 대책이 취약 기업에 속한 비우량 기업들이 급한 불을 끄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내다봤다. 크레딧 시장 한 관계자는 "A등급에 포진해 있는 기업체들이 일차적으로 도움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업황이 계속 나쁘다면 '약발'이 길게 가지는 못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IB업계 한 관계자는 "구조조정 지연과 신용등급 봐주기가 지금의 회사채 시장 양극화를 만들어낸 원인"이라며 "근본적인 체질 개선 노력이 뒤따라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하반기 이후 업황이 살아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그렇지 않다면 유동성 문제는 계속될 것이다"라고 걱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