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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고궁 거닐며 달빛샤워 '황제의 힐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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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덕궁 달빛기행 참가자들이 달빛을 받으며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 안쪽에서 문화재해설사의 안내를 듣고 있다. 관람객 100명은 20명 단위 5팀으로 나뉘어 3분 간격으로 입장, 각각 문화재해설사의 안내를 들어며 궁궐 산책을 즐긴다.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제공
  
▲ 창덕궁 달빛기행 참가자들이 창덕궁 후원인 주합루와 주합루를 비춰낸 1000㎡ 넓이의 부용지를 휴대폰 카메라로 담고 있다.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제공


"광클(빛의 속도만큼 빠른 클릭질) 끝에 겨우 궁궐에 입성하니 달에서 계수나무가 보이네요." 

지난 20일 오후 7시33분 궁을 지키는 수문장이 서울 종로구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을 밀고 나왔다. 삼삼오오 흩어져있던 관객들의 흥분된 시선이 일제히 수문장을 향한다. 

지난 6일 오후 2시 인터넷 티켓 예매 사이트에서 예매 시작 3분만에 '완판'된 바로 그 '창덕궁 달빛기행'의 시작이다. 

3년 전 출발한 달빛기행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창덕궁을 최소한의 불빛과 소음 속에서 궐내를 돌아보고 궁중연회를 즐길 수 있도록 꾸며진 이벤트다. 

"창덕궁은 세계 문화 유산이라 조명 설치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보름달이 뜨는 한달에 5일만 개방할 수 있습니다. 오른쪽 달빛을 보면서 입장해주세요."

문화해설사의 설명과 함께 돈화문을 들어서자 문 건너편 4차선 도로의 경적·오토바이 소리는 이미 동시대 산물이 아닌 듯 멀어진다. 

관람객은 조선시대 양반인양 말소리를 낮췄고 걸음 속도를 늦추며 달빛이 가득 쏟아지는 인정전 앞 넓은 조정으로 들어섰다. 



인정전을 등지고 조정을 바라보던 한 관람객은 "청사초롱을 들고 들어오는 사람이 꼭 신하같지 않아?"라며 같이 온 여자친구에게 웃어보였다. 3분 후 출발한 다른 팀 관람객은 졸지에 신하가 됐다. 

후원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주합루는 불빛을 받아 고운 단청 빛깔을 뽐내고 있다. 바로 앞의 부용지가 1000㎡ 넓이의 넉넉한 품으로 주합루를 비춰낸다. 관객들의 작은 탄성 소리는 웅장한 거문고 소리에 스며든다. 

연경당으로 넘어가는 길은 키 큰 소나무가 달빛을 숨기자 관람객이 든 청사초롱이 길을 안내한다. 어둠 속에 총총히 떠가는 청사초롱 불빛이 창덕궁과 어우러지며 또 하나의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어낸다. 

딸 덕분에 30여년 만에 부인과 궁궐 데이트에 나섰다는 석모(62)씨는 "신혼기분이 난다"며 만족해했다.

달빛과 함께하는 호사는 매달 보름달이 뜨는 날을 전후해 딱 5일만 누릴 수 있다. 인원은 하루 100명씩, 혹한·혹서기를 제외한 봄·가을철에만 개방하기 때문에 1년으로 따지면 달빛기행 관람객은 3000명(외국인 1200명 포함) 남짓이다. 1인당 비용은 3만원으로 비교적 고가다. 

남편과 초등학생 자녀와 울산에서 당일치기로 상경한 고정숙(39)씨는 "동네에서 네 집이 신청했는데 우리만 예매에 성공했다"며 "개학해 같이 못 온 중학생 딸이 컴퓨터 두 대를 놓고 씨름한 덕분에 겨우 예매했다"고 말했다. 





하루 입장객 100명은 20여명씩 5팀으로 나눠 문화재해설사와 함께 움직여야 한다. 안전상 이유로 자유관람은 제약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까다로운 달빛기행에 '광클'하는 이유는 뭘까. 

여자친구의 티켓 예매 솜씨 덕분에 달빛기행에 참가했다는 강민규(33)씨는 "밤에 궁궐을 온다는 특이점만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달빛 속에서 차분하게 천천히 걸으며 바쁜 낮 시간을 돌이켜 볼 여유를 즐길 수 있어 더 좋았다"며 "힐링한 느낌"이라고 말했다. 

달빛기행 해설을 맡은 문화재해설사 이종춘(30)씨는 "낮과 달리 개방되는 곳은 적지만 후원과 상량정 등 비개방 구간이 포함됐다는 점도 매력적이고 필요 이상의 빛에 노출됐던 도시민이 궁궐의 고즈넉함에 운치를 더하는 달빛을 통해 도시의 흥분과 다른 차분함을 느끼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김유리기자 grass100@metr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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