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이한 유머와 뛰어나지만
비관적인 통찰력이 담긴 '지구를 지켜라'가 2003년 개봉됐을 때 한국 영화계는 무척이나 흥분했다. 연출자인 장준환(44) 감독을 두고 "천재가
나타났다"며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그러나 이후 10년 동안 극장가에서 그의 이름이 내걸린 영화는 만날 수 없었다. 강산이 한 번 바뀌고 나서야
'화이 : 괴물을 삼킨 아이'(이하 '화이'·9일 개봉)로 돌아온 장 감독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며 머리를
긁적였다.
▶ 그에게 공백기는 없었다
남들이 보기엔 메가폰을 놓고 있었으나, 수면 아래에선 활발하게 움직였다.
두 편의 옴니버스물('카멜리아' '러브 포 세일)을 연출했고, '엎어지긴'(영화화가 중간에 취소됐다는 뜻의 영화계 속어) 했지만 모 흥행작의
속편 등 상업영화도 쉬지 않고 준비했었다.
개인사에서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40대 중반에 접어들었고 그 사이 배우 문소리와 결혼해
딸을 얻었다. "그 기간을 허비한 건 아닙니다. 결과물을 제대로 내놓진 못했지만 많은 걸 배웠죠. 마냥 놀기만 했다면 '화이'가 나올 수 없었을
겁니다. '화이'는 내용도 그렇지만, 내적 외적 변화와 실패를 경험했던 환경이 함께 빚어낸 제 성장의 흔적이죠."
▶ 신선하고 짜릿한
시나리오
그의 말처럼 이번 영화는 한 소년의 아픈 '성장'을 그린다. 잔혹무도한 범죄자 집단에게 유괴당한 뒤 이들을 아빠라 부르며
자라난 주인공 화이(여진구)가 문제의 아빠들을 상대로 처절한 복수극을 벌인다는 줄거리다.
시나리오를 처음 봤을 때 우선 장르적으로
신선하고 짜릿한 재미가 크게 와 닿았다. 살부(殺父) 의식 등 인간의 예민하고 내밀하며 금기시되는 심리와 행동을 집요하게 헤집는 원작자의 의도
역시 무척 훌륭해 연출을 결심했다.
그런데 바로 후자가 문제였다. 최소한의 윤리 의식과 책임감 없이는 다룰 수 없는 대목이었다.
장 감독은 "비슷한 소재의 여느 할리우드 액션영화처럼 비춰질 수도 있다는 게 가장 위험했다. 세상과 충돌하는 미성년자의 성장을
다루는데 있어 행여라도 표피적으로 접근하면 '몸통만 있고 머리는 없는' 영화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면서 "현란한 테크닉과 화술을 최대한
배제하고 끝까지 진심을 가려가려 한 이유"라고 말했다.
▶ 만족스럽게 작품
끝내
몸도 마음도 건강한 여진구와 극중 범죄집단 리더 석태 역의 김윤석 등 훌륭한 선후배들의 도움으로 비교적 만족스럽게 작업을
끝냈다. 이제 남은 건 관객들의 반응이다. "관객들이 장르적 쾌감을 편안하게 만끽하길 우선 원하고요. 더한 욕심이라면 보고 나서 각자가 내면의
괴물을 꺼내볼 수 있길 원하죠. 한 마디로 '자라나는' 영화였으면 좋겠어요."
차기작은 아직 꿈도 못 꾸고 있다. 일단 '화이'에서
벗어나는 게 급선무다.
주위에선 아내와 함께 하는 영화도 권유중이다. 장 감독 본인도 싫지 않은 제안이다. 배우로서의 문소리도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능력이 아내의 연기를 뒷받침할 수 있을 때만 가능한 얘기다. 자칫 나로 인해 아내가 망가지면 집안이
큰일난다"며 씩 웃는 얼굴에서 가장의 책임감이 묻어났다./조성준기자
when@metroseoul.co.kr·사진/박동희(라운드테이블)·디자인/김아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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